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 미술 (문단 편집) === 회화 === 쿠빌라이 칸이 남송을 멸망시킨 이후 한족 지식인들은 몽골의 위협을 피해 은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중국에 짧은 평화가 찾아왔음에도 많은 지식인들은 은거를 유지했는데 이것이 송에 대한 충절의 반영이었던 여타 다른 개인적인 사정에 의해서였건 이들은 항주와 양자강 일대에 은거하며 일군의 집단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 중 회화의 영역에서 가장 먼저 두드러진 행보를 보인 인물은 남송 멸망 당시 이미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고 있었던 전선(1235? ~ 1301?)이었다. 그는 송 왕조에 대한 충절을 이후로 항주 일대에서 칩거 생활에 들어갔고 그 즈음 시화에 몰두하여 원대 회화의 전통을 만들어냈다. 당시 중국의 회화 전통은 송대 이후 한족 정권이 소멸되자 그 명맥이 끊겨버리고 말았다. 원의 궁정의 경우 화가를 "고용"하기는 했지만 후대에까지 영향을 줄만한 뚜렷한 전통을 보이지는 않았고 이에 따라 송나라 시대에 이룩하였던 회화의 기법들과 양식들이 퇴조하기 시작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선은 두 가지 방향으로 원대의 회화 전통을 구축해 나갔다. 하나는 복고적인 경향으로 송대 이전의 회화 양식을 복원하는 것이다. 전선의 입장에서 복고는 단순히 송의 양식을 따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오래된 양식, 다시 말해 당나라와 오대 시대에 그려졌던 회화 양식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전선은 당대에 자주 그려지던 청록산수의 양식을 부활시켰다. 바위, 나무의 선묘나 농채의 장식적 사용, 평면적 구성은 전적으로 당의 회화 양식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형식적인 측면 이외에도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당대에 유행하던 인물들에 대한 묘사를 즐겨 그렸는데 <왕희지관아도>에서 물가에 노니는 새를 바라보는 왕희지의 모습을 그린 것이 대표적이라 하겠다. 전선이 추구했던 또 다른 방식은 혁신의 측면으로 복고적인 양식을 재해석하는 것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전선의 회화에서 이 점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그가 10세기에 활동했던 동원의 방식을 따라하면서부터 인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의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점철되는 경우가 많았다. 전선이 실패했던 혁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인물은 다름 아닌 전선의 제자였던 조맹부(1254 ~ 1322)였다. 조맹부는 회화사뿐만 아니라 문화사, 정치사 측면에 있어서도 매우 상징적인 인물인데 쿠빌라이가 그를 강남 한족 회유책의 일환으로 중앙 관직에 발탁한 인물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조맹부는 그의 스승이었던 전선이 관직을 거절하고 술과 시서화에 연명한 것과 달리 한림원의 학사직을 맡으며 중앙 정계에 오랫 동안 머물러 있었다. 물론 이것은 당대 지식인들의 많은 비판을 낳았다. 특히 강남 지식인들이 조맹부의 이러한 행보를 비판했고 또 조맹부 자신도 평생을 이러한 행보를 후회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원나라의 중앙 정부에 진출한 것은 원의 궁정에서나 강남의 지식인 계층에서나 큰 변화를 야기했음에는 틀림없다. 이후 명대의 서술에서도 나오겠지만 명나라의 회화에서는 이렇듯 궁정의 미술과 지식인의 미술을 이어줄 가교 역할을 할 사람이 없었고 이것은 명대 후반기에 문인화와 직업화의 구분이 더욱 뚜렷해지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것을 보았을 때 조맹부는 그 자신의 회화적인 성취만큼이나 중국미술의 통합과 교류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 [[파일:조맹부, 작화추색도.jpg]] || 조맹부, <작화추색도>, 13세기, 대만고궁박물원 혁신의 측면에서 그가 보여준 업적은 <작화추색도>에서 잘 드러나는데 얼핏 보기에는 드문드문 보이는 산의 모습과 후경이 과감하게 생략된 점으로 인해 강남 지역의 산수로 보이지만 실은 산동성의 한 지방을 표현한 것이다. 피마준 기법의 사용과 해조묘기법의 사용은 이 그림이 강남의 산수와 화북의 산수를 적절히 융합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점들로 인해 조맹부는 오대 시대의 대표 화가인 동원, 거연의 화풍과 송대의 이성, 곽희의 화풍 그리고 당대의 청록산수를 총정리하여 화풍의 혁신을 이루어 냈다는 평을 받는다. 또한 그는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도 이전의 송대 화원 화가들과는 다른 독특한 관점을 견지했다. 그는 비록 실물을 뛰어나게 그리더라도 그 안에 담겨있는 마음이 없으면 그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중국 회화이론에서 흔히 형사에서 청신으로 변화했다고 하는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이후 문인화가들이 꾸준히 견지하던 관점이었으며 비단 중국을 넘어 동아시아에서 문인화의 양식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회화관 중 하나였다. 또 그는 회화의 필법을 글을 쓰는 것과 같이 생각하였는데 이러한 생각은 서화용필동법이라는 이론으로 정립되어 후대에 이른다. 동양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붓이라는 도구를 통해 이루어지고 붓을 쓴다는 것 자체가 필획의 차이를 가져오니 그의 이러한 생각은 넓게보면 당나라 [[왕희지]의 생각과도 유사하다고 하겠다. 이처럼 그가 닦아놓은 화풍과 관념은 이후 여기적 문인화가들의 전거가 되어 원말사대가로 불리는 화가들의 탄생으로 이어지며 더 나아가서는 명,청 시기 문인화 전통의 고전적 사례로 여겨진다. 조맹부가 활약하던 시기 이후 오늘날까지도 동양화에서 큰 전거가 되는 4명의 뛰어난 화가들이 탄생하는데 오진, 황공망, 예찬, 왕몽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흔히 [[원말사대가]] 혹은 원사대가로 불리며 오늘날까지도 칭송되고 있으며 이후 문인화의 형식적인 완성이 이 시기에 거의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원말사대가들 앞에 당면한 문제는 크게 4가지가 있었는데 우선 전선과 조맹부와 같은 과거의 선배들이 의도적으로 무시했던 송의 화풍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이냐가 첫번째였고 이와 마찬가지로 송의 회화에서 보이는 통일성을 어떻게 회화에서 구현할 것이냐의 문제가 있었다. 또한 그들의 표현 방식에 있어서 직업화과와 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 형태에 힘을 부여할 것인지에 대한 여부와 평범하거나 의고적인 주제를 묘사하면서도 어떻게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로 남았다. 네 명의 화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 문제에 답하면서 본인들만의 독특한 화풍을 형성했는데 이들 각자의 화풍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연구되고 20세기 이후의 미술사학자들까지 그 연구 경향이 이어지는 바, 이에 대한 연구가 상당하다. 이들은 세부적인 양식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으나 공통적으로 가장 나이가 많았던 오진에서부터 가장 나이가 어렸던 왕몽까지 오대 시기 강남산수의 대표이자 전선, 조맹부가 따르고자 했던 동거파 산수의 복고적 경향을 띈다는 공통점이 있다. 왕몽의 시기에 이르러 중국은 원명교체기라는 커다란 정치적인 변화를 겪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국의 미술은 다시 새로운 양상으로 접어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